본관은 우계(羽溪)자는 발지(拔之)이며 처음 이름은 청(請)이다. 우계이씨(羽溪李氏)의 시조 좌복야(左僕射) 이양식(李陽植)과 박씨(朴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양식의 선계는 경주이씨(慶州李氏)이다. 모친 박씨가 뜰에서 촛불을 켜고 하늘에 후사를 빌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어린아이가 촛대를 타고 내려와 가슴에 품은 꿈을 꾸었다. 그로부터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름을 청(請)이라 하였는데 이는 하늘에 청을 하여 얻었다는 뜻이 있다. 뒤에 순우(純祐)로 고쳤다.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지었으며 의종17년(1163)에 문과에 장원급제 하였다. 이때 지공거는 동지추밀원사 판삼사사(同知樞密院事判三司事) 김영윤(金永胤)이다. 김영윤은 신라 종실인 각간 김주원(金周元)의 후손으로 관향은 명주(溟州), 즉 강릉이다. 이순우의 선계가 경주이씨이고 강릉의 속현인 우계 출신이니 좌주(座主)와 문생(門生)이 신라에 뿌리를 두고 강릉을 관향과 출신지로 하는 지연(地緣)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영윤의 부친은 시중 김인존(金仁存)이며 형제인 김영석(金永錫), 김영관(金永寬)도 함께 문과에 급제 하였다.
이순우(李純祐)는 출사한 뒤 충주사록(忠州司祿)으로 임명되어 외직으로 나갔다가 여러 벼슬을 거쳐 명종(明宗)조에 공역승(恭驛丞)이 되면서 직한림원(直翰林院)을 겸 하였다. 이때 명종의 모후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가 유창(乳瘡)을 앓고 있었는데 왕이 이순우(李純祐)에게 기도문을 짓게 하였다. 이순우(李純祐)의 기도문에 다음과 같은 귀절이 있었다.
“유창은 어머니 가슴에 생겼으나
그 아픔은 짐의 마음속에 있도다”
기도문을 읽다 이 구절을 본 왕은 “나의 마음을 앞서 헤아렸다”고 하며 감탄 하였다. 이일로 왕이 각별히 총애하여 우정언(右正言) 지제고(知制誥)로 발탁하였으며 이후 여러차례 승진하여 국자좨주(國子祭酒) 간의대부(諫議大夫)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올랐다.
이순우(李純祐)는 모친의 지극정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모자간의 정애 대해서 각별하여 위로는 왕과 태후 간에 이르고 아래로는 미물에 까지도 미쳤다. 다음의 상소는 기본적으로 백성의 어려움을 살피어 건의한 것이다. 어미 젖소와 송아지에 대한 따뜻한 배려가 이순우(李純祐)의 넉넉한 인품을 드러내 주고 있다.
“근래에 팔관회에 쓸 약을 달이기 위하여 의관에게 분부하여 해마다 개경 근처 백성들이 기르는 암소를 끌고와 젖을 짠 다음 고아서 우유 즙을 가공하게 되니 이 때문에 어미 소와 송아지가 다 피해를 보게 됩니다. 그 약은 원래 위급할 때 쓰는 약도 아니며 밭갈이 하는 소가 또한 줄게되니 이를 폐지하소서“ 왕이 그 의견을 쫓아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벼슬이 국자대사성에 까지 이르렀으나 명종 26년(1196) 4월에 최충헌(崔 忠獻) 형제가 무신 실권자 이의민(李義玟)을 제거한 직후 화를 당하였다. 최충헌(崔忠獻) 형제가 거사를 일으켜 이의민(李義玟)을 죽이자 권절평(權節平) 손석(孫碩) 길인(吉仁)등이 반(反) 최충헌(崔 忠獻) 모의를 꾀하였다. 최충헌(崔忠獻) 형제는 이를 적발한 뒤 이순우(李純祐)등을 모의에 가담 하였다 하여 살해하고 말았다.
이순우(李純祐)와 함께 인은관(仁恩館)에 갇혔다가 화를 입은 이들은 참지정사 이인성(李仁成), 상장군 강제(康濟), 문득려(文得呂), 승선(承宣) 문적(文迪), 최광유(崔光裕)등 모두 35인에 달했다. 최충헌(崔忠獻)은 의의민(李義玟)이 경주 출신인 점을 의식, 신라에 뿌리를 둔 이순우(李純祐)를 무리하게 연루 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순우는 2007년 10월에 경기도 파주시 고려통일대전에 배향 되었다.